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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의 세계문화기행] 예술과 혁명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17) 에르미타시 박물관(11) - 카톨릭 교회 옹호자 루벤스

2019-11-18 17:0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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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루벤스 그림 감상을 마무리하면서 성상(聖像)과 성화(聖畵)에 대하여 알아본다. 종교개혁 2세대 칼뱅(1509∽1564)은 성모 마리아와 성인들의 성상과 성화에 대해 공공연하게 적대감을 보였다.

성화와 성상은 “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그 무엇과도 비슷한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성서 구절에 따라 하느님의 영광을 그릇되게 표현하고 변질 시킨다는 것이다. 칼뱅은 성찬식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빵과 포도주와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한편 플랑드르 지방 안트베르펜은 일찍부터 루터파의 거점이었으나 1550년부터 칼뱅파의 영향력이 확대되었다. 1560년경에 칼뱅주의는 겐트·발랑시엔 등 프랑드르 지방 전체로 확산되었고, 1566년에는 안트베르펜에서 성상파괴운동이 일어났다.

1566년 8월, 인구 10만 명의 상업도시 안트베르펜 밖 벌판에 2만5000명의 군중들이 칼뱅파의 노천설교를 듣기 위해 모였다. 그런데 일부 극렬주의자들이 ‘성상(聖像)파괴 난동’을 일으켰다. 이 난동은 8월10일 서부 프랑드르 지방에서 시작하여 2주일도 안 되어 17개 지방에 퍼졌다. 8월 20일과 21일 사이엔 안트베르펜의 30개 교회가 약탈당하고, 8월 22일에는 헨트가 약탈당했다. 성상이 파괴되고 성화가 불태워졌고, 성상 파괴운동이 전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이러자 프랑드르 지방을 통치하고 있는 스페인 왕 펠리페 2세(1527~1598)는 1567년에 강력 진압을 통하여 공포정치를 시작했다.

이후 종교전쟁이 일어났고 1588년에 프랑드르 북부 지역 7개주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안트베르펜을 위시한 남부 플랑드르 지역은 펠리페 2세에 의해 다시 가톨릭 지역이 되었고, 반종교개혁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안트베르펜의 지역 유지들은 교회에 성상 및 성화를 다시 세우기 시작했다. 이는 1563년에 채택된 트리엔트 공의회의 종교미술에 대한 결의문에 고무된 것이었다. 결의문은 이렇다.

“그리스도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성인들의 성상들은 교회에서 반드시 형상화되고 보존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에 합당한 존경심이 주어져야 한다.”

한편 루벤스는 로마에 가서 미술수업을 하고 1609년에 안트베르펜에 돌아왔다. 그는 프랑드르 섭정의 궁정화가가 되었고 종교화 제작에 분주했다. 루벤스는 1610년에 산타 발부르가 교회의 세 폭 제단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세움’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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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세움(벨기에 안트베르펜 대성당 소장). 사진=김세곤 제공

1612년에는 병기제조업자 조합이 의뢰한 안트베르펜 대성당의 세 폭 제단화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를 그렸다.

1619년에 루벤스는 예수회 성당의 제단 장식을 위해 세 폭 제단화와 39점의 천장화를 주문받았다. 예수회는 스페인의 기사이자 수사인 로욜라성 이냐시오가 1534년에 파리에서 창설한 수도회로 1540년 교황 바울로 3세의 승인을 얻은 후 교황에 대한 절대충성을 맹세하는 전위대가 되었고, 폴란드·아시아·신대륙 등지에 천주교를 전파시켰다.

루벤스가 예수회로부터 주문 받은 그림 중 유명한 그림이 ‘성 프란체스코 하비에르의 기적’이다.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1506~1552)는 예수회 신부로서 1542년에 인도 고아에 도착하여 포교활동을 했으며 1549년에는 일본에 건너가 가고시마와 야마구치에서 전도하다가, 1551년에 전도를 위해 중국에 갔지만 입국하지 못하고 1552년에 11월에 광동성 근처에서 열병으로 선종했다. 그는 1622년에 성인으로 시성되었고 ‘모든 선교사의 수호성인’이다. 그는 성 바울 이후 가장 많은 사람을 그리스도교에 입교시켰다고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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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란체스코 하비에르의 기적(오스트리아 빈 미술사박물관 소장). 사진=김세곤 제공

루벤스는 1620년까지 무려 63점이나 되는 종교화를 그렸다. 그의 공방에는 수백 명의 견습생이 지원할 정도로 명성이 높았는데, 안톤 반다이크도 루벤스 공방에서 일했다. 아울러 루벤스의 종교화는 판화로 만들어져 유럽 전역에 알려지게 되었다.

한마디로 루벤스는 바로크 미술의 거장이었다. 바로크(Baroque)는 ‘일그러진 진주’ 또는 ‘불규칙하게 생긴 진주’라는 뜻이다. 바로크 미술은 로마 가톨릭 옹호의 열망과 기대에 부응했다. 신자들의 시선을 압도할 만한 극적이고 화려하면서 교훈적인 장면을 연출하여 가톨릭 교리를 강건히 하였고, 미술 그 자체가 신앙고백이었다.

여행칼럼니스트/호남역사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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